국민의힘 대변인 공식 논평 및 보도자료입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은 2015. 7. 10 (금) 11:00,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백우 김녹영 전 국회부의장 30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백우 선생의 국회부의장 취임사의 한 구절인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 정치가 있는 국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아끼지 않겠다.”라는 말처럼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이뤄지는 국회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정성일 상근부대변인은 전했다.
백우 김녹영 선생께서 서거하신 후 어느덧 30년이 흘렀다. 나라안팎으로 어려운 오늘, 평생 우직함과 올곧음으로 고난의 시대를 이겨내셨던 선생의 삶을 회고하며 추모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뜻 깊게 생각한다.
저는 백우 선생과 개인적 친분은 없었다. 하지만 제 삶이 선생의 삶과 짧게 교차하던 순간이 있었다. 1984년은 민주야당세력이 군사독재의 폭력적 통치에 맞서 다시 민주화 행진을 시작하던 해였다. 이 해 봄에 창립된 민주화추진협의회는 민주주의 회복의 진원지였다.
백우 선생은 창립 상임운영위원으로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창립을 주도하셨고, 저도 그 자리에 있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창립은 머지않아 신한민주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다. 당 부총재였던 백우 선생은 19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의 돌풍을 이끌었다. 2·12총선에서 신민당이 일으킨 돌풍은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분출이었다. 이 총선으로부터 민주화는 비가역적인 것이 되었다. 총선에서 백우 선생은 광주의 선택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동료 의원들로부터 민주화에 대한 평생의 헌신을 인정받아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셨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원로 정치인으로서 경륜을 본격적으로 펼치려던 바로 이 때 병마가 찾아와, 선생은 결국 1985년 7월에 별세하시고 말았다.
선생께서 불의에 돌아가신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과 광주 시민에게 너무나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의 삶이 선생의 삶과 교차했던 이 1년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영원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저는 이 1년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백우 선생께서 돌아가시고 2년 후 우리나라는 6월 민주화항쟁을 통해 완전한 민주 회복의 길에 들어섰다. 그 이후 한 세대가 흐르는 사이에 선거를 통해 여야 사이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민주주의는 공고화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결코 최선의 민주주의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자기성찰과 민주적 절차를 통해 보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찾아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굳은 신념과 의지를 가진 백우 선생과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우 선생께서 연설하신 부의장 취임사의 한 구절이 30년이 지나서도 제 마음을 끈다.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 정치가 있는 국회를 만드는 데 일조를 아끼지 않겠다.”는 구절이다. 독재 하에서도 의회가 지닌 민주적 잠재력을 평가하고, 의회민주주의의 본질인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추구하고자 했던 선생의 고심이 이 한 구절에 잘 드러나 있는 듯하다.
이 점에서 우리 후배 정치인들은 백우 선생의 영정 앞에서 고개를 떳떳이 들 수 없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설득과 예의의 언어를 버리고 비난과 무례의 언어를 퍼붓는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원리주의자가 되어 공동의 지평을 찾는 데 실패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을 반성하며 정치가 있는 국회를 만들고자 한다는 선생의 마지막 공식 발언 한 구절을 오늘 거듭 되새겨 본다.
백우 선생은 생전에 “백두산 아래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곧잘 자조하셨고 백우라는 호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시세에 따르지 않고 오직 한 길만을 걸어, 결국 시세가 당신의 길에 합류하게 하는 올곧은 삶을 사셨다. 드문 삶을 사셨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2015. 7. 10.
새누리당 공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