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식
  • 보도자료·논평
  • 대변인

대변인

국민의힘 대변인 공식 논평 및 보도자료입니다.

홍준표 대통령 후보, 부산 거점유세 주요내용[보도자료]
작성일 2017-04-29

  홍준표 대통령 후보는 2017. 4. 29(토) 19:30, 부산광역시 덕천로터리 젊음의 거리에서 거점유세-자유대한민국 수호를 위한 부산대첩을 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산시민여러분, 제가 18살 때 우리 아버지가 대학간다고 7만원의 빚을 냈다. 그 당시에 등록금이 5만6천원이었다. 5만6천원 등록금 내고 1만4천원 들고 친구도 없고 친척도 없는 서울에 저 혼자 야간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그때 열차 속에서 불렀던 노래가 ‘추풍령’이다. 오늘 길에 현수막을 봤을 것이다. 거기 보면 ‘일당 800원받던 경비원의 아들, 까막눈의 엄마를 둔 아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저는 경남 창녕 남지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이 졸딱 망해서 7살 때 리어카 끌고 아버지와 가족들 전부 이틀 걸어서 대구로 이사 갔다. 대구 가서 신천동에서 달셋방 살면서 그 당시에는 동사무소에 강냉이죽을 구호물자로 줬다. 지금 어르신들은 기억할 것이다. 주전자 들고 강냉이죽 타 와서 먹고 살았다. 신천국민학교 2학년 다니다가 신암동 가서 3학년을 다녔다. 도시에서 저희 아버지가 막노동을 했다. 저희 아버지는 무학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까 할일이라고는 막노동 밖에 없다. 막노동 하다가 도저히 안 되어서 4학년 때는 창녕읍으로 내려와서 거기서 또 1년 살다가 또 살길 찾아서 떠난 곳이 합천 덕곡 율지다. 산골로 들어가서, 내가 국민학교 6년 다니면서 5번 전학 했다. 옛날에 그런 이야기를 하니 전부 아버지가 공무원했냐고 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막노동했다. 합천 가서 낙동강변에 600평 정도 하천부지를 빌려 보리농사 지으면서 먹고 살았다. 그때는 안동댐이 되기 전이었다. 보리농사 해서 1년 먹고 살아야 되는데 봄에 홍수나면 보리가 다 떠내려간다. 여기 계신 어르신들은 장리곡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옛날에 장리곡을 줄 때가 있었다. 좀에 보리쌀 한가마니 얻으면 가을에 한가마니 반을 줘야 한다. 그런 시절을 보내고 우리아버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우리는 이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고 먹고살기 어렵지만 공부라도 잘해야겠다. 그래서 대구에서 장학금준다고 해서 보리쌀 두말 들고 대구로 올라갔다. 중고등학교 6년을 대구 영남중고를 다녔다. 그 당시 공납금이 석달에 1650원이었다. 공납금 없이 학교 다니게 해준다고 해서 공부를 했는데, 제가 3학년 때 의사를 하고 싶었다. 워낙 힘들게 사니까 의사를 하면 돈도 많이 벌고 존경 받아서 문과가 아니라 이과를 갔다.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는데 3학년 여름방학 때 저희 아버지가 불러서 하는 말이 ‘돈이 없다. 대학 보낼 돈이 없으니까 육군사관학교 가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 육군사관학교는 특채였다. 그래서 시험 봐서 합격했다. 그 당시  71년 10월이었다. 육사가 되고 난 뒤에 신체검사만 하면 되니까 두 달을 놀았다. 12월 23일 즈음 되어서 합천 덕곡 율지에 농협조합장이 비료를 횡령해 놓고 나중에 아버지 비료 타온 그 날짜에 두 포대 잃어버렸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정상적으로 타온 비료인데 자기 죄를 숨길려고 아버지에게 덮어 씌웠다. 이틀 동안 덕곡 지소에 가서 ‘우리 아버지 그런 사람 아니다’고 사정했는데, 안 봐주더라. 그래서 이틀 동안 곤혹 치르고 각서 쓰고 나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아무래도 경찰을 잡으려면 검사해야겠다고 그래서 육사 안가고 바로 25일 문과 공부해서 고려대 법학과 갔다. 대학교 2학년 때, 이제는 대학가서 고학을 했다. 합천 덕곡 율지에서 뒷집 사람이 자기아버지를 칼로 찔려서 죽였다. 그리고 자기 집에 불을 질렀는데 바람이 불어 우리집 오두막에 붙어서 집이 홀랑 다 탔다. 시골에서 집도 없어졌다. 그래서 할 수없이 74년 6월 30일 울산으로 갔다. 전재산을 정리하니까 32만원이 남았다. 그것을 들고 울산에 가서 복산동에 달셋방 살면서, 지금 내 가족은 전부 울산에 살고 있다. 40년 되었다. 울산도 내 고향이고, 창녕도 내 고향이고, 대구도 내 고향이고, 제가 고향이 참 많다. 그런데 우리아버지가 울산에 갔는데 그 당시 현대조선소에 담이 없었다. 철조망 바닷가에 쳐놓고 배를 지었다. 거기에 밤새도록 지켰다. 왜 그런가 하면 낮에 배 짓다가 남은 철근 조각을 훔쳐가는 사람 있으니까 그것 못 훔쳐가도록 백사장에 경비원들 앉혀 놓고 지키게 했다. 천막도 안 해줬다. 의자도 등받이 의자 주면 잔다고 동그란 의자 하나 주고 밤새도록 백사장에서 철근을 지켰다. 그렇게 하는데 날이 워낙 추우니까 옛날에는 영하 18도 했다. 추우니까 현대조선소에서 막소주를 줬다. 소주를 먹여 술이 취해서 추위 견디라고, 막소주를 1년 드시다가 그 이듬해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지금 남지 고향 공동묘지에 계시다. 대통령 나오면 전부 조상묘 이장하지 않나. 이회창 총재, 이명박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다 그랬다. 돌아가시면서 75년도에 물어봤다. ‘내가 잘되면 묘소 옮겨 줄께’고 그런 이야기 했는데 아버지 말이 뭐냐면 ‘내 팔자는 여기다. 내 팔자는 공동묘지 갈 팔자다. 어떻게 되든지 옮기면 안 된다’ 그래서 검사하고 국회의원하고 도지사하면서도 내 아버지 묘소 안 옮겼다. ‘니는 어떻게 되더라도 니 인생이 있고, 내 팔자는 여기까지다.’ 돌아가면서 묘소 못 옮기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내 아버지 묘소 안 옮긴다. 저희 어머니 모시고 서울로 갈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서울에 한 번 와보시고 아파트 조그마한 단칸방에서 일주일 있다가 내려가셔다. 울산에 내려가셔서 내 여동생이랑 누나 아이들, 조카들 키운다고 단칸셋방 얻어서 그렇게 사셨는데 단 한 번도 내 아들이 검사라도 해본 적이 없다. 왜 안했냐고 물으니까 그러면 네가 얼마나 창피할 것이냐 엄마가 돈 한푼 없어 달셋방 사는데 네가 얼마나 창피할 것이냐고 했다. 어떨 때는 동사무소 가서 자식 없다고 구호물자 타는 그것 보면서, 저희 검사 때 어려웠다. 지금 검사하고는 달라서 그때 검사하던 사람들은 사람 잡아오면 밥을 사줬다. 지금은 밥값이 나오고 수사비도 나온다. 그때는 수사비도 안 나왔다. 우리가 검사할 때는 내가 월급을 받으면 절반을 직원들 밥값으로 내놓아야한다. 그 시절이었기 때문에 엄마에게 줄 돈이 없었다. 매달 준 돈이 겨우 15만원이었다. 그래서 ‘엄마, 변호사 개업하면 돈 많이 준다’고 했는데 검사 그만두고 그 다음해 돌아가셨다. 내 엄마처럼 나는 아버지는 별로 안 좋아했다. 우리 어릴때부터 힘들게 고생만 시켰으니까, 무능해서 고생만 시켰다. 우리 아버지가 한량이다. 촌에서 제법 논밭이 있었는데 일 년 열두 달 기생집 가서 놀다가 그 돈 다 들어먹고 7살 때부터 고생시켰으니까, 우리 누나나 여동생이나 아버지 생각하면 아무 말 안한다. 고생 많이 시켰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내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본다. 까막눈이고 글을 몰라도 저는 정치판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내 엄마라고 대답한다. 제가 대구 가서 부산 시민들에게 정치 이야기 하고 뻔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요즘은 국민들이 정치를 더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이 종북인사다, 뽑으면 안 된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 그리고 안철수 뒤에는 더 무서운 박지원이 있다는 이야기를 안 해도 다 아신다.


  제가 왜 서민대통령이 되겠다고 얘기했는가. 이 땅의 70%가 서민이다. 서민들의 꿈 첫 번째가 자기 자식 잘되는 것이다. 자신은 짓눌리고 당하고 억울하게 핍박과 멸시를 당하고 살아도, 내 자식만큼은 잘 살고 출세해서 남들에게 떳떳하게 살기 원하는 게 대한민국 서민들의 가장 소박한 꿈이다. 그래서 제가 경남지사 할 때 ‘서민자녀 교육지원 사업’이란 걸 했다. 제가 어릴 때 너무 힘들게 살아봐서 서민자녀들을 공부시키려고 마음먹었다. 경상남도에서만 유일했다. 초·중·고 학생들에게는 책을 사주고 인터넷 강좌 비용을 대줬다. 대학에 들어가면 서민자녀들을 선발해서 170명한테 1인당 300만원씩 등록금을 줬다. 제가 대학교 들어갈 때 아버지가 70,000원을 빚내서 등록금으로 5,6000원 내는 거 봤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서민자녀들은 10월이 되면 강남 요지인 서울 수서에 기숙사를 짓는다. 공부 좀 하는 서민 자녀들 400명 정도를 선발해서 한달에 15만원만 받고 삼시세끼 주는 호텔급 숙소다. 금년 10월이면 그 기숙사 오픈한다. 저는 제가 어렵게 살아봐서 서민들을 어떻게 지원할지 누구보다 더 잘 안다.


  두 번째가 오두막이라도, 작지만 내 집을 갖는 것이 서민들의 꿈이다. 무지렁이처럼 무학인 야간경비원 하던 아버지와 까막눈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 41살, 어머니 39살 때 아들 하나 보자고 낳은 게 저다. 저에게 우리 아버지는 제일 미운 존재다. 그런데 아버지가 좋은 건 어릴 때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야단을 절대 치지 않으셨다. 자식이 하겠다는 것이라면 돈이 없어도 빚을 내서라도 해주시려 했다. 그런 아버지 어머니 덕에 고학이라도 해서 공부할 수 있었고, 부모님을 생각해 열심히 공부해 고시도 됐고, 또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두 분 생각에 비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살았다.


  지금 언론이나 여론조사를 믿지 마시기 바란다. 경비원과 까막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소문난 뒤에 ‘잘하면 내 아들도 대통령 시킬 수 있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틀 전부터 폭등했다. 홍준표가 대통령 되면 이 나라 서민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정말 대통령이 한번 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첫 번째가 서민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가 안보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안보가 휴전 이래 가장 위급하다. 이렇게 위급한 나라의 안보를 지킬 대통령은 강단과 결기 그리고 배짱과 뱃심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홍준표는 독고다이로 살면서 배짱 뱃심으로만 살았다. 검사를 할 때 깡패들이 식칼 들고 석궁을 쏘며 죽이려고 해도 전 눈 하나 깜짝 안한 사람이다. 김정은 같은 어린애는 제가 대통령이 되면 꽉 쥐고 살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좌파들과 종북세력 전교조 그리고 강성귀족노조 민주노총들 눈치보고 살살 달래가면서 어떻게하면 대통령을 좀 오래 해볼까 했다. 그리고 정치인들 역시 세 세력들 겁나서 말도 못했다. 그런데 홍준표가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전교조부터 잡을 것이다. 그 다음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강성귀족노조를 다 잡겠다.


   세 번째, 종북세력도 다 때려잡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 젊은 청년들이 일자리 절벽이 됐는지 생각해 보셨는가. 일자리가 없어진 가장 큰 원인이 강성귀족노조 때문이다. 지금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나라 기업이 2만개 가량이고, 해외 일자리가 340개가 된다. 왜 해외에 나갔겠는가. 전체 근로자의 3%밖에 안 되면서 노동시장을 어지럽히고 걸핏하면 광화문에 가서 파업하는 세력 때문이다. 얼마 전 촛불 세력 주범도 노조 아닌가.


  지금 전부 좌파 광풍 시대가 돼서 탄핵으로 시작해 언론도 반쯤 넘어가고 여론조사 90%도 넘어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자체 조사한 게 있다. 전국적으로, 호남에서도 ‘이번에는 경비원 아들 대통령 시켜보자’ 라는 말이 유행이다. 홍준표가 되면 청년들 일자리가 넘쳐나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첫째 강성귀족노조를 때려잡아야 한다. 그래야지 기업이 투자를 한다.


  제가 경남지사 할 때 어느 자동차 회사에서 50만대를 증산한다고 해서 제가 하동에 100만평의 매립지를 줄 테니 경남으로 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틀 뒤에 노조 때문에 국내에는 증산을 안 한다, 해봤자 노조 좋은 일 시킨다고 하며 거절하고 이틀 뒤 북경에 50만대를 증산한다고 발표했다. 지금 그런 형편이다. 작년에 중소기업이 해외투자한 게 6조 4천억 정도다. 문제는 대기업만 나가면 협력업체도 따라 나간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베트남에 나가면 1차 밴드, 2차 밴드까지 다 나간다. 다 노조 때문이다. 노조도 한국노총은 괜찮지만 민노총이 문제다. 그래서 제가 경남에 있을 때 일도 안하고 맨날 파업만 하고 도민 세금만 축내는 진주의료원을 폐업시켜 버렸다. 그게 바로 민주노총이다. 3년을 싸웠다. 3천명을 동원해 도청을 에워싸고, 아침마다 파업 했지만 전 눈 하나 깜짝을 안했다. 3년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진주의료원 사건이 있고나서 전국의 도립병원이 전부 정상화가 됐다. 그 전에는 노조들이 다 파업을 하면서 문을 닫네마네 하다가 진주의료원 사건 이후에는 전국 도립병원들이 전부 정상화 됐다. 잘못해서 엉뚱한 짓을 하면 진주의료원처럼 문을 닫을 수 있고 홍준표 같은 사람이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며 전부 정상화 됐다.


  또 무상급식 문제로 전교조와 1년 붙어 항복을 받았다. 대통령이 사회악을 축출하는 데 있어 눈치 볼 거 없다. 사회악, 한국사회의 적폐라고 생각하면 무조건 없애야한다. 서민과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자신들은 퇴직하면 아들에게 고용 세습하고, 도지사 연봉과 맞먹는 연봉 1억을 받는 노조가 걸핏하면 파업하는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요즘 민주노총에서 곧 나를 고소한다고 한다. 고소를 수업이 당했지만, 전 눈 하나 깜짝 안한다. 오히려 버르장머리를 안 고치면 대한민국에 미래가 없다.


  부산시민 여러분, 전 여기 한·두 번 더 올 것인데 물어보겠다. 5월 9일날 경비원과 까막눈의 아들도 대통령 될 수 있지 않는가. 저는 여러분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면 5년 동안 돈 물릴 일도, 모을 일도 없다. 먹고살건 있으니 진심으로 대한민국 5천만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70%에 달하는 대한민국 서민들을 위해 5년 열심히 일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살려고 한다.


   이제야 방송이나 신문 상황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더라. 언론들이 따라다녀 보면 분위기를 알지 않나. 후보 중에서 동원도 안했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는 후보가 어디 있나. 이제 대구는 완전 뒤집어다. 대구 국회의원들께서 대구는 75%를 해준다고 하시고 경북은 80%를 해준다고 하신다. 부산은 딱 절반만 해주시기 바란다. 경남은 제 고향이지만 못된 세력들이 많다. 부산보다 더 심하다. 좌파들이 바글거린다. 4년 4개월 동안 땅을 판 것도 아니고 재정개혁과 행정개혁으로만 빚 1조 4천억을 갚아주고, 50년 먹고 살거리까지 다 해주고 청렴도 1위까지 만들어줬는데 제가 퇴직하는 날 문 앞에서 소금 뿌렸다. 그래서 제가 경남에 있을 때 도지사 했을 때 60%의 득표를 받았으니 그만큼만 해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가만 보니 해줄 거 같지도 않으니 이렇게 부산와서 사정한다.


  부산시민 여러분 제가 이제 비행기 타고 올라가야 하지만 앞으로도 두어 번 더 올거다. 우리 부산 시민 여러분들이 주변에 전화도 좀 해주시기 바란다. 요즘 어르신들도 스마트폰 많이 사용하시지 않나. 언론 믿지 마시고 그걸 이용해서 홍보해주시기 바란다. 다시 묻겠다. 5월 9일 경비원과 까막눈의 아들도 대통령 될 수 있는지.


  여러분 정말 약속하겠다. 그동안 홍준표는 참 바르게 살아왔고, 누명도 덮어쓰기도 했다. 정치판에 있다 보면 온갖 소문을 다 듣는다. 제가 그래도 천운이 있다. 또 세탁기에도 들어갔다 나왔다. 부산시민 여러분들만 믿겠다. 아무리 각박하고 위급한 환경이라도 저는 유머를 잊지 않으려고 한다. 지도자가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면 국민들이 불안하다 그래서 저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유머를 잃지 않으려 농담도 하고 시중하고 엄숙한 순간에도 농담을 한다. 그러니 잘하겠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물어보고 가겠다. 5월 9일 경비원 아들 대통령 시켜주시겠는가. 까막눈 아들 대통령 아들 시켜주시겠는가. 이제 서울로 올라가니 큰 절 한번 하겠다. 정말 감사하다.   


2017. 4. 29.
자유한국당  공보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