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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다 (① 리더십 비교)-위기에 강한 안정적 리더 VS 위기를 회피하는 불안한 리더-[논평]
작성일 2012-12-10


▲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지난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됐다. 강력한 쇄신을 약속한 박 후보는 당사를 판 뒤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천막 당사’와 ‘붕대투혼’으로 당초 50석도 어렵다는 탄핵 정국에서 121석을 얻어 여당을 견제할 강력한 야당으로 한나라당을 살려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지난 2004년 2월 대통령 민정수석에 임명된 후 맞은 탄핵 위기 정국에서 “심신이 지쳤다”며 자진 사퇴 후 부인과 함께 히말라야 등정을 떠났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야당의 탄핵 소추가 이루어지는 3월까지 한 달 동안 여권 인사들과 연락이 두절(“네팔에서 현지 신문을 보고 탄핵 사실을 알았다”고 토로)되었다.

 

  결론적으로, 박 후보는 위기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던지며 당을 살려냈고, 문 후보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렸을 때, 몸이 지쳤다며 대통령을 외면한 채 연락을 끊어버린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상황이었지만, 책임을 지는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책임을 회피하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참으로 대조적인 위기 대처 방식이다.    

 

▲ 노무현 정부 시절, 朴—文 후보의 위기관리 능력

 

  박근혜 후보는 3년간 당무를 주관하며, 부패 정당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기소된 당원은 당원 자격을 정지하고, 유죄 확정시 영구 제명하는 등 내부 징계를 강화했다. 또한, 자신과 계파가 다른 홍준표 의원을 혁신위원장으로 임명하여 당의 강도 높은 변화와 쇄신을 이끌었고, 이를 통해 10%에도 미치지 못했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40%대까지 끌어올렸다.  

 

  특히, 박 후보는 지난 2005년 12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사학법을 직권 상정하는 등 ‘4대 악법(△사학법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법 △언론관계법)’ 강행처리에 나서자 곧바로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결국, 3개월에 걸친 장외투쟁 끝에 여·야는 ‘사학법’ 재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철회, ‘과거사법’·‘언론관계법’ 완화 등에 합의했다.

 

  ‘정치쇄신’과 ‘여당견제’에 있어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것이 언론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문 후보는 참여정부 시절 국정운영 경험을 대선후보로서 가장 큰 장점으로 부각시키고 있지만, 오히려 사회갈등 조정 능력의 한계를 보였다. 문 후보는 당시 △전시 작전통제권 전환 △용산 미군기지 평택 이전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 선정 문제 △화물연대·철도노조 파업 △천성산 터널공사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갈등조정 능력이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2004년 천성산 고속철 터널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던 지율 스님을 여러 차례 찾아가 중단을 권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천성산 터널공사는 2년 반 정도 중단됐고, 무려 6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결론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박 후보는 탁월한 갈등조정 능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뚝심 있게 정책을 추진해나갔지만, 문 후보는 갈등 조정에도 실패했고, 자신의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데에도 실패했다.

 

▲ 「2012년 4월 총선」 에서의 위기관리 능력

 

  박근혜 후보는 지난 2011년 12월, 당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디도스 파문으로 또다시 위기에 내몰리자 당을 수습할 비상대책위원장에 선출됐다. 워낙 상황이 안 좋았기에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 후보가 상처만 입고 대선후보로서의 입지까지 흔들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박 후보는 ‘새누리당’으로 당 이름을 바꾸고, ‘당 쇄신’과 ‘경제 민주화’를 앞세워 보수층과 중도층을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그 결과 4월 총선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152석을 얻어 새누리당을 제1당으로 도약시켰다.

 

  문재인 후보도 대선 유력후보로서 4월 총선을 사실상 진두지휘했으나, △한명숙 대표와의 갈등 △비례대표 공천 잡음 △통합진보당과의 무리한 연대 △김용민 막말 파문 등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자신의 주도 하에 야심차게 추진한 ‘낙동강 벨트’ 전략(부산·경남 10석 목표)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총선에서 박 후보는 ‘정치쇄신’과 ‘경제민주화’를 앞세운 강력한 리더십으로 예상을 뒤엎는 대승을 거뒀고, 문 후보는 ‘안철수 효과’와 ‘야권연대 시너지’라는 두 가지 호재를 등에 업고도 예상을 크게 밑도는 성적을 초라한 기록했다.

 

  특히, 박 후보가 ‘당 쇄신’ 및 ‘경제 민주화’를 둘러싼 당내 갈등을 성공적으로 조정한 반면, 문 후보는 당내 계파 갈등 및 정책 갈등을 도리어 증폭시키면서 총선 참패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만 했다.

 

▲ ‘대통령 탈당’ 막은 리더십 VS ‘대통령 비극’ 부른 리더십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정부와의 정책 차별화에 주력하면서도 청와대와의 갈등을 최소화하여,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의 임기 중 탈당’이라는 악순환을 끊었다. 대선 과정에서도 대통령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지 않음으로써 ‘미래 권력이 현재 권력을 밟고 가는’ 나쁜 정치 관행을 타파했다.

 

  문재인 후보는 지난 2006년, 열린우리당이 ‘구당파’와 ‘신당파’로 나뉘어 권력투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또다시 청와대를 떠나 책임을 회피했으며, 대통령 임기를 1년 남긴 2007년 2월, 노 전 대통령이 탈당하자 그때서야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복귀했다. 탄핵 당시와 마찬가지로 위기 때에는 도망갔다가 수습되면 돌아오는 모습을 다시 연출한 것이다. 

 

  또한, 문 후보는 노무현 정부 시절 두 차례 민정수석을 지내면서도, 양길승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향응 파문과 박연차 정관계 로비 파문(노 전 대통령 형 건평씨 구속됨)에서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관리에 실패했다. 결국 문 후보는 정상문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영부인 권양숙 여사에게 불법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등 위기상황 대처에 실패함으로써 자신이 모시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12.  12.  10.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박 선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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